(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무섭니?"
여자골프 세계랭킹 4위 김세영(28)이 2015년 처음 참가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첫 대회를 마치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아버지의 첫 말이었다.
김세영은 자신이 충분히 영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도착한 미국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거리의 간판을 읽을 수도 없었고, 음식을 주문할 수도 없었다. 대회 로컬룰이 적힌 종이는 무용지물이었고, 대회 주최 측의 지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애 첫 LPGA 투어를 2라운드 컷 탈락이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마쳤다.
김세영은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실수한 것 같아요. 여기 있는 모든 게 너무 힘들고,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 복귀할까 봐요"라고 푸념 아닌 푸념을 토로했다고 한다.
한참을 말없이 김세영의 얘기를 듣던 아버지는 담담하게 "무섭니? 한 주만 더 해 보는 게 좋겠다. 어떻게 되는지 보고 그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며 달랬다.
김세영은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았다. 어렸을 때처럼 두려움에 맞서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조언은 김세영에게 큰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김세영은 일주일 만에 다시 참가한 LPGA 투어 퓨어실크-바하마 LPGA 클래식에서 거짓말 같은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LPGA 투어 진출 한 달 만에 얻은 값진 우승이었다.
김세영은 6년 뒤 당시의 상황들을 "물론 내 영어가 하룻밤 사이에 좋아지지는 않았다. 호텔에 체크인하고 식당 메뉴를 읽는 것이 여전히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 내 결정이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LPGA투어에 정착했다"고 담담하게 글로 남겼다.
김세영은 9일 LPGA 투어 인터넷 홈페이지에 '두려움을 향해 달려가라'(Run Toward Your Fears)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김세영이 인터뷰로 구술한 내용을 LPGA 측이 글로 재구성했다.
LPGA 투어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국 선수의 에세이가 실린 것은 지난해 고진영(26), 이정은(25), 유소연(31)에 이어 네 번째다.
김세영에게 골프는 두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조언이 큰 힘이 됐다.
김세영은 글에서 "아버지는 '본능에도 불구하고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상대와 맞서야 한다. 골프 대회에서도 그렇듯, 싸움에서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두려움에 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며 아버지의 가르침에 감사함을 전했다.
고등학교 1학년 진로를 고민하던 김세영에게 아버지는 똑같은 조언을 했다고 한다.
김세영은 "10대 때 골프에 전념했지만 여전히 내가 골프선수가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며 "아버지는 내게 '만약 네가 프로 골프 선수가 되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아.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고 압박감 속에서 플레이하는 법을 배워야 해'라도 조언해주셨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조언은 진로를 두고 고민하던 김세영에게 큰 힘이 됐다.
김세영은 "부모님이 어느 쪽이든 나를 지지해 주실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게 내게 필요한 전부였다. 그렇게 골프에 몸을 던졌다"고 말했다.
이어 "16살 때 한국 여자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자가 됐다. 2년 후 프로로 전향했고 KLPGA투어에서 5승을 했다. 그중 두 번은 플레이오프에서 거둔 우승이었다"며 "그때 나는 아버지의 조언대로 긴장을 억제하고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세영은 태권도장 관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5살 때부터 태권도를 단련했다. 12살에 이미 태권도 3단을 달았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하다.
김세영은 어렸을 때부터 익혀온 태권도가 골프에 많은 도움에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유연성, 지렛대의 원리, 균형감각, 적절한 순간에 스피드를 내는 법 그리고 공을 때릴 때 자신을 통제하는 것 등 골프와 태권도는 공통점이 많다"며 "내 몸을 알고 올바른 타이밍과 위치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은 드라이브샷을 페어웨이로 보내거나 발로 송판을 격파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김세영은 11일(현지시간)부터 나흘간 미국 플로리다주 벨에어의 펠리컨 골프클럽(파70·6천353야드)에서 열리는 LPGA 투어 펠리컨 챔피언십(총상금 175만 달러)에 출전한다.
지난해 이 대회 우승자인 김세영은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부담감 대신 즐기는 마음으로 대회에 임하겠다는 각오다.
김세영은 10일 대회 공식 인터뷰에서 "디펜딩 챔피언으로 왔기 때문에 부담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작년에 워낙 좋은 기억이 있어서 이번 대회도 즐겁게 치고 싶다"며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플로리다 탬파에 살았기 때문에 다시 오게 되어 너무 좋다"고 말했다.
LPGA 투어 홈페이지에 기고한 글에 대해서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글을 보고 굉장히 감동했다. 그 순간들이 다 생각이 나서 닭살도 많이 돋았다. 내 이야기를 좋은 글로 표현해 주셔서 감명 깊게 읽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