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권훈 기자 = 프로 골프 대회를 앞둔 공식 연습 날이나 프로암 때면 선수와 캐디는 코스 파악에 분주하다.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그린 파악이다.
선수와 캐디는 눈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각종 측정 장비를 들고 다니며 그린 기울기 등을 꼼꼼하게 살핀다.
가장 일반적인 장비는 토목 건설 공사 현장에서 쓰는 수평계다.
이런 측정 결과는 꼼꼼하게 야디지북에 적어넣는다.
캐디와 선수에게는 대회 준비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작업이다.
심지어 그린을 3D로 스캔한 자료를 따로 구입하기도 한다.
이런 정보는 전문 업체가 대당 1억 원에 이르는 측정 장비를 동원해 만들어낸다.
하지만 내년부터 그린 경사 측정 장비를 들고 다니며 메모하는 선수나 캐디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된다.
전문 업체가 제공하는 그린 정보 역시 경기 중에는 활용할 수 없다.
세계 골프 규칙을 관장하는 R&A와 미국골프협회(USGA)는 그린 파악에 측정 장비 사용 금지를 뼈대로 한 새로운 규칙을 내년 1월1일부터 시행한다고 2일(한국시간) 공동 발표했다.
이 규칙은 코스 정보를 담은 야디지북에 선수나 캐디가 경험과 관찰로 얻은 내용은 적어넣고 활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기계 등 장비를 통해 파악한 정보는 아예 적어넣을 수 없다.
오로지 선수와 캐디의 눈과 감각에만 의존해 경기하라는 뜻이다.
새 규칙은 모델로컬룰(MRL)이다.
모든 골프 경기에 다 적용되는 건 아니다. 각국 투어나 협회가 알아서 채택하라는 얘기다.
하지만 미국프로골프(PGA)투어와 DP 월드 투어(옛 유러피언프로골프투어),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는 이미 한 달 전에 선수들에게 이 규칙 시행을 예고했고 당장 내년 1월 대회부터 적용한다.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는 아직 내년 시즌을 시작하려면 시간이 있어 다음 달쯤 규칙 개정에 나설 예정이다.
KLPGA투어 최진하 경기위원장은 "해외 투어가 채택하는 규칙은 우리 선수들의 국제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따르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 규칙이 적용되면 '필드의 과학자'로 불리는 브라이슨 디섐보(미국)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디섐보는 온갖 과학 장비를 이용해 코스와 그린을 파악해서 경기 때 꼼꼼하게 활용한다.
캐디 업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눈과 느낌만으로도 그린을 잘 읽어내는 재능을 지닌 캐디가 몸값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최진하 위원장은 "R&A와 USGA는 골프 경기에서 장비와 과학 기술이 개입하는 추세에 제동을 걸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드라이버 길이 제한에서 보듯 공과 클럽의 성능을 가능하면 제한하고 싶어한다. 이번 그린 정보 제한 역시 과학 기술보다는 사람의 능력만으로 경쟁하라는 취지로 보인다"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