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천병혁 기자 = 1970년대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레지 잭슨은 '미스터 옥토버(Mr.October)'라고 불렸다.
잭슨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이던 1973년과 뉴욕 양키스 유니폼을 입은 1977년 월드시리즈에서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는 등 매년 10월에 열리는 포스트시즌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쳐 그런 별칭을 얻었다.
양키스는 잭슨이 팀을 떠난 후 대체 선수로 당시 최고 타자였던 데이브 윈필드를 역대 최고액으로 영입했다.
하지만 윈필드는 정규시즌에는 잘했지만 정작 포스트시즌에서는 기대에 못 미쳤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양키스 구단주는 "내가 원한 건 '미스터 메이(Mr. May)'가 아니라 '미스터 옥토버'"라며 자기 선수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KBO리그에서도 포스트시즌만 되면 유독 펄떡펄떡 활약하는 선수들이 있다.
과거 SK 와이번스(SSG 랜더스 전신)의 왕조를 이끌었던 박정권이 그랬고, 지금 두산 베어스 공격의 첨병 정수빈이 그렇다.
LG 트윈스와 준플레이오프에서 MVP로 뽑혔던 정수빈은 이번 플레이오프까지 포스트시즌 통산 성적이 76경기에서 타율 0.301, 32타점, 7홈런, 11도루다.
정규시즌 통산 1천279경기에서 타율 0.281, 27홈런, 221도루보다 가을야구 성적이 더 좋다.
반면의 정수빈의 동갑내기이자 두산의 간판타자인 박건우는 가을야구 성적이 정규시즌에 훨씬 못 미친다.
박건우는 정규시즌 통산 타율이 0.326으로 역대 3위에 오른 교타자이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통산 타율 0.201에 불과하다.
총 51경기에 출전해 홈런은 고작 2개에 그쳤고, 타점도 20개밖에 되지 않는다.
LG 트윈스의 주포 김현수도 마찬가지다.
김현수는 통산 타율 0.319로 역대 6위에 올라 있지만 포스트시즌 89경기에서 타율 0.254, 7홈런, 39타점으로 자존심을 구겼다.
천하의 이승엽과 양준혁, 이종범 등도 포스트시즌 통산 타율이 2할 5푼대에 불과했다.
반면 SK 가을야구에서 최고 스타였던 박정권은 포스트시즌 62경기에서 타율 0.296, 11홈런, 40타점으로 정규시즌 성적보다 더 좋았다.
그렇다면 정수빈이 박건우·김현수보다 가을 야구를 잘하고 박정권이 이승엽·양준혁보다 성적이 좋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은 심적인 부담감과 상대의 집중 견제로 해석할 수 있다.
똑같은 4타수 1안타라도 그럭저럭 박수받을 수 있는 선수와 아쉽다는 지적이 나오는 간판타자가 느끼는 압박감은 상당히 다르다.
투수들의 견제 심리도 차이가 크다.
아무래도 중심 타자를 상대할 때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쉬운 승부를 절대 하지 않으려 한다.
야구는 단체 종목이면서도 개인 종목 성향을 띠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투수와 9명의 타자 등 10명씩 팀을 이루는 단체 게임이지만 기본적인 승부는 타자와 투수의 1대1 대결 구조다.
게다가, 축구나 농구처럼 연속되는 플레이가 아닌 공 하나 던질 때마다 인터벌이 많은 '멘털 스포츠(Mental Sports)'이다 보니 긴장하기 십상이다.
이렇다 보니 가을야구에서는 기본적인 실력보다 경기를 즐길 수 있는 '강심장'을 지닌 선수가 더 잘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심리 상담사를 고용하는 이유도 선수들의 경기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